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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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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거란 전쟁은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까지 고려와 요나라(거란)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다. 발해 멸망 후 거란에 대한 고려의 적대적 태도, 송나라와의 외교적 관계, 그리고 거란의 동아시아 지배 전략 등이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993년 1차 침입, 1010년 2차 침입, 1018년 3차 침입을 거치며 고려는 서희의 외교 담판, 강조의 결사항전,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 굴곡진 과정을 겪었다. 전쟁 이후 고려는 요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송나라, 요나라와 대등한 세력 균형을 이루었으며, 천리장성 축조와 나성 건설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했다. 또한,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대장경이 유입되고, 관련 서적이 전파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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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고려-거란 요 전쟁 지도
고려와 거란(요)의 위치 (고려는 흰색, 요는 녹색)
시기993년, 1010년, 1018년~1019년
위치한반도 북부
원인요나라의 고려송나라간의 관계 단절 요구
결과고려의 승리와 고려의 형식상 거란 사대, 거란의 강동 6주 포기로 동아시아 세력 균형 재정립
교전 세력
교전국 1고려
교전국 2
지휘관 및 지도자
고려고려 성종 (1차 침공)
고려 현종 (2~5차 침공)
서희
하공진
강조
대도수
이현운
양규
김숙흥
강감찬
소손녕
요 성종
소적렬
야율세량
소합탁
소배압
옐뤼 페느
병력 규모
고려1차 침공: 알 수 없음
2차 침공: 약 300,000명
3차 침공: 알 수 없음
4차 침공: 알 수 없음
5차 침공: 약 208,000명
1차 침공: 약 800,000명
2차 침공: 약 400,000명
3차 침공: 알 수 없음
4차 침공: 알 수 없음
5차 침공: 약 100,000명
사상자 및 피해
고려1차 침공: 알 수 없음
2차 침공: 최소 1~3만 명, 수도 이북 지역 약탈
3차 침공: 1만 명 이상
4차 침공: 알 수 없음
5차 침공: 알 수 없음
1차 침공: 알 수 없음
2차 침공: 알 수 없음
3차 침공: 알 수 없음
4차 침공: 알 수 없음
5차 침공: 지휘부 포함 대부분 전사
주요 전투 및 사건
1차 침공 (993년)외교적 해결, 고려는 송과의 단교(명목상), 요의 연호 사용, 조공을 약속함. 요는 고려에 여진족이 할거하는 강동 6주의 영유권을 줌. 이로 인해 고려의 세력이 압록강까지 확장됨.
2차 침공 (1010년)요군이 수도를 함락하고, 북부 여러 주와 개경이 점령되는 큰 피해를 입음. 요군은 고려를 평정하고 송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목적 달성에 실패함. 요군은 1차 침공 조건에 더해 현종의 입조, 6주의 반환을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했으나, 지켜지지 않음.
3차 침공 (1018년~1019년)고려의 승리. 요군이 강동 6주 탈취에 실패하고 퇴각함.
4차 침공불명
5차 침공고려의 승리. 요군 전멸.

2. 배경

993년, 거란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옛 땅을 차지하기 위해 처음으로 고려를 공격하였다. 994년, 고려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 거란의 칙명을 받들겠다고 알렸다. 그 후, 1010년(현종 원년)에 이르는 시기에 고려는 거란에 공물을 바치고, 거란어를 배우고, 결혼을 청하고, 화폐를 바치고, 책봉을 청하고, 생일을 축하하는 등의 친선을 베풀었다.[53]고려사』는 이 시대의 역사 기록에서 거란 황제를 “거란주”라고 기록하고 있다.[53]

1014년에는 송나라와 국교를 회복하고 거란과 단교하였다.[43]

2. 1. 고려 건국과 국제 정세

고구려거란의 관계는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져 왔지만, 고려 시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밀접해졌다. 이 시기 거란은 부족 분열 상태에서 벗어나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57]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 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922년(태조 5년)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동족으로 받아들였다.[11][12][13][14][15] 한편, 거란에 대해서는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 부르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57]

고려 태조는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942년 요 태종이 보낸 낙타 50필을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이고,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 보내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57][16] 이러한 강경책은 고려 정종 때 광군(光軍) 30만 명 양성, 광종 때 서북 및 동북 지역에 성을 쌓고 군사 시설을 갖추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는 정책으로 이어졌다.[57]

한편, 고려는 송나라가 건국된 이후 송과 화친 정책을 실시하였다. 979년 송나라가 통일을 이룩한 후, 985년(성종 4년)에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거란 협공을 제의하기도 하였다.[57] 송나라는 압록강 중류에 세워진 발해 유민의 독립 국가 정안국과 해상을 통해 왕래하며 거란을 협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는 요나라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57]

요나라는 성종 대에 이르러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991년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는 등 고려 침공을 준비하였다.[57] 960년에 송이 건국되자, 고려는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맺었는데, 이는 송과 적대하는 (거란)에게 고려 침공의 동기가 되었다.[42][43]

2. 2. 송나라와의 관계

고려송나라가 건국된 이후 송과 화친 정책을 실시하였다. 979년에 이 통일을 이룩한 후, 985년(성종 4년)에 고려에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거란 협공을 제의하였다.[57] 송은 압록강 중류에 세워진 발해 유민의 독립국가 정안국과 해상을 통해 내왕하며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따라서 거란으로서는 고려의 움직임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57]

960년에 송이 건국되자, 고려는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맺었다.[42] 이것은 송과 적대하는 요(거란)에게 고려 침공의 동기가 되었다.[43]

2. 3. 거란(요나라)의 성장

거란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 요나라(遼)를 건국하였다.[57] 922년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는 한편 거란에 대해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 부르고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57]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사신 30인은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였다.[57] 고려 정종 때에는 광군(光軍) 30만 명을 양성하였고, 광종 때에는 서북쪽에 맹산·숙천·박천·문산 등 청천강 유역과, 동북쪽으로는 영흥·고원 등에 성을 쌓거나 군사시설을 갖추고, 또 광군을 광군사(光軍司)로 개편하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57]

979년에 통일을 이룩한 은 985년(성종 4년) 고려에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거란 협공을 제의하였다.[57] 송나라는 압록강 중류에 세워진 발해 유민의 독립국가 정안국과 해상을 통해 내왕하며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따라서 거란으로서는 고려의 움직임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57]

요 태종이 오대의 첫 번째인 후량과 후당의 싸움에 끼어들어 연운십육주를 얻는 등 성과를 올렸으나 끝내 중국 남침에 실패하고 급사한 뒤, 수구파와 진보파의 대립과 정치 싸움으로 고려와 겨룰 여유가 없었으나, 982년 이후 정국이 안정되었다. 요 성종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 진화(振化), 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을 준비하였다.[57]

3. 전쟁의 원인

993년, 거란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옛 땅을 차지하기 위해 처음으로 고려를 공격하였다. 994년, 고려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 거란의 칙명을 받들겠다고 알렸다. 이후 현종 원년(1010년)까지 고려는 거란에 공물을 바치고, 거란어를 배우고, 결혼을 청하고, 화폐를 바치고, 책봉을 청하고, 생일을 축하하는 등 친선을 베풀었다.[53]고려사』는 이 시대의 역사 기록에서 거란 황제를 “거란주”라고 기록하고 있다.[53]

926년 만주에서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다.[40] 거란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를 요청하는 등 화친책을 폈지만, 고려가 발해 세자 대광현의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양국 국교는 단절되었다. 942년 고려는 거란이 보낸 사신을 섬에 유배 보내고, 선물로 받은 낙타 50마리를 굶겨 죽였다.[41] 960년 송이 건국되자, 고려는 송과 국교를 맺었다.[42] 이는 송과 적대하던 (거란)에게 고려 침공의 동기가 되었다.[43] 송나라로 진출을 계획하던 요는 압록강 하류에 정안국을 세워 송과의 교통을 차단했다.[44] 993년, 요는 고려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했다.[45]

1차 침공 이후 양국 관계는 개선되어 거란에서 고려로 포로와 노예를 송환하고, 거란 황실에서 고려 왕실로 혼인을 하고, 고려에서 거란으로 유학을 가는 등 교류가 있었다. 995년, 996년, 998년, 1003년, 1006년에는 고려가 조공을 바치는 등 평화를 유지했다.[52] 그러나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고, 1009년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다.[43] 거란 성종은 이를 명분으로 “불의를 바로잡는다”며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는 이름으로 40만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친정했다.[39][43] 고려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성종은 1010년 12월 곽주를 함락시켰다.[53]

1010년 11월, 성종이 이끄는 40만 군이 고려를 침공했다.[39][43] 고려 조정은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총지휘관), 양규(楊規)를 전선 지휘관,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로 임명하고,[48] 30만 군세로 강동 6주 중 하나인 통주(평안북도 선천군)에 방어선을 구축했다.[39] 양규가 이끄는 흥화진 수비대는 요군의 맹공을 견뎌냈고, 성종은 20만 군세로 흥화진을 포위한 채 나머지 20만으로 남진했다.[48] 강조는 통주성에서 여러 차례 요군을 격파했으나, 결국 대패하여 3만 명이 넘는 고려군이 죽거나 다치고 많은 병사가 포로가 되었으며, 강조 또한 살해되었다.[48] 동주, 곽주, 귀주, 영주 함락과 강조의 패배 소식에 고려 조정에서는 강화 요청이 나왔으나, 강감찬(姜邯賛)이 왕과 중앙 정부를 일시 남쪽으로 피신시키고 군대를 재정비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여 현종과 대신들이 따랐다.[48] 1011년 12월 28일, 고려 수뇌부는 남쪽 해안 나주로 피신했고, 요군은 서경(평양) 점령에 실패했지만, 1011년 1월 1일 개경을 점령했다.[48]

강동 6주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내륙으로 진군한 요군은 양규의 지속적인 후방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고, 포로로 잡혔던 많은 이들이 고려군에 합류했다. 양규는 700명 병사로 통주에서 1000명이 넘는 병사를 모집, 밤늦게 곽주에 잠입하여 요군 6000명을 살해하고 남녀 7000명 이상을 통주로 이동시켰다.[54] 양규와 김숙흥(金淑興)은 구주에서 매복 공격으로 요군 1만 명 이상을 죽였고, 수일에 걸친 추격전으로 7000명 이상을 죽이고 포로 5000명을 되찾았다. 성종은 대군을 이끌고 구주를 침공했으나, 10일간 격전 끝에 양규와 김숙흥은 전사했지만 고려군은 요군을 크게 격파하고 포로 3만 명을 되찾았다. 패퇴한 요군은 압록강으로 후퇴했으나, 흥화진을 지키던 정성(鄭成)의 맹공으로 대부분 익사했다. 개경 점령 10일 후인 1011년 1월 11일 현종이 신하를 자처하며 화의를 청하자, 요군은 1차 침공 후 조항에 더해 매년 조공과 현종의 입조, 6주 반환을 요구하고 철수했다. 개경은 요군에 의해 불탔다.[49] 이후 고려군은 철수하는 요군을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철수하는 요군은 폭우로 어려움을 겪었고, 북부 여러 성들도 요군이 돌아가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52] 2차 침공 철병 때 여섯 주 반환과 현종의 입조가 요구되었으나, 현종은 병을 이유로 입조하지 않았다.[43] 1015년, 거란은 강동 6주 반환과 현종의 입조를 요구했으나, 고려는 이를 이행하지 않고 사신을 인질로 감금했다.[43] 1014년 고려는 송과 국교를 회복하고 거란과 단교하였다.[43]

3. 1. 거란의 고려 침공 명분

1009년, 고려의 장군 강조가 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정변을 일으켜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26] 거란는 1010년, 살해당한 목종을 척결한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27][28]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삼아 고려를 침공했지만, 실제로는 고려송나라의 관계를 끊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 지역을 차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3. 2. 고려의 외교적, 군사적 대응

993년, 는 고려의 북서쪽 국경을 침략했다. 요나라 사령관은 군사 규모가 8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8][9] 군사적 교착 상태 이후,[17] 양국 간 협상이 시작되어 고려는 공식적으로 송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요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요나라의 역법을 채택하기로 합의했다.[18][19][20] 또한, 고려 외교관 서희의 주도로 이루어진 협상 결과, 고려는 요나라와 고려 국경 사이, 여진족 부족이 점령하고 있던 압록강까지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편입했다. 고려는 이 땅이 고구려의 옛 영토였다는 명분을 내세웠다.[21][22][23] 이 합의로 요나라 군대는 철수했다. 그러나 고려는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며,[24] 새로 얻은 북쪽 영토에 요새를 건설하여 방어를 강화했다.[25]

1009년, 강조가 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26] 요나라는 1010년, 살해당한 목종을 척결한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다.[27][28] 강조는 요나라의 첫 번째 공격을 막았지만, 두 번째 공격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8][29] 고려 현종은 수도가 함락되어 불타자[28][30][31] 나주로 피신했다.[8] 요나라는 재편된 고려군의 반격을 우려하여 철군하였다.[32] 이후 고려 현종은 화친을 청했으나, 요나라 황제는 현종이 직접 와서 조공을 바치고 국경 지역을 할양할 것을 요구했고, 고려는 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양국 간 10년간의 적대 관계가 지속되었으며, 양측은 전쟁에 대비하여 국경을 강화하였다.[32][30] 요나라는 1015년, 1016년, 1017년에 고려를 공격했지만 결정적인 승패는 없었다.[33]

1018년, 거란은 10만 대군을 모아 고려를 침략하려 했다. 이에 대비하여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 동쪽 개울에 제방을 쌓았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강감찬은 제방을 터뜨리고 1만 2천 기병으로 기습 공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히고 후퇴로를 차단했다. 거란군은 수도를 향해 진격했으나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과 끊임없는 공격에 직면하여 북쪽으로 후퇴했다. 후퇴 과정에서 귀주에서 강감찬과 고려군은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35]

4. 전쟁의 경과

1009년, 강조가 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수립하자, 요(거란)1010년에 살해당한 목종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다.[27][28] 강조는 요나라의 첫 번째 공격을 막았으나, 두 번째 공격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고,[8][29] 고려 현종은 수도가 함락되고 불타자[28][30][31] 나주로 피신해야 했다.[8] 요나라는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재편된 고려군의 반격을 우려하여 철군하였다.[32]

제2차 침공 철수 조건으로 여섯 주의 반환과 현종의 입조가 요구되었으나, 현종은 병을 이유로 입조하지 않았다.[43] 1014년에는 과 국교를 회복하고 거란과 단교하였으며, 1015년에는 거란의 강동 6주 반환과 현종의 입조 요구를 거부하고 사신을 인질로 감금했다.[43]

1018년, 거란은 소배압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했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명의 병력으로 방어에 나섰다.[39] 강감찬은 흥화진 동쪽의 삼교천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고 1만 2천 명의 정예병을 매복시켰다가 거란군이 삼교천에 이르자 둑을 터뜨려 큰 피해를 입혔다.[39] 강민첨은 자주(慈州)에서, 조원대동강 도하 지점에서 거란군을 공격했다.[39][48] 김종현은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개경 방어에 합류했으며,[48] 강감찬은 개경 주변을 초토화하여 거란군이 양식을 얻지 못하게 했다.[48]

소배압이 후퇴를 시작하자, 강감찬은 추격을 명령했다. 1019년 2월 1일, 구주(龜州)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 주력 부대가 거란군의 퇴로를 끊었고, 김종현이 이끄는 개경 수비군도 합류하여 고려군은 포위 공격을 펼쳐 거란군을 대부분 전멸시켰다.(귀주대첩)[39]

1020년, 고려가 다시 신하의 맹세와 조공을 약속하자 거란은 화의를 맺고 양국 간 평화가 회복되었다.[39][51]

4. 1. 제1차 침입 (993년)

993년, 고려의 북서쪽 국경을 침략했다. 요나라 사령관은 그 규모가 80만 명이었다고 주장했다.[8][9] 고려 조정은 윤서안을 파견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실패했고[46], 소항덕이 이끄는 요 군대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청천강 이북을 제압했다.[47] 고려 조정은 박량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각각 임명하고, 삼군을 편성하여 맞섰다.[48] 현재의 안주시에 본거지를 둔 고려군은 청천강 북안에 군대를 배치하여 요군에 대비했다.[48] 남진하는 요군은 청천강에서 고려군의 격렬한 저항을 만나 황해도의 풍산성을 점령했다.[48]

고려 조정은 사신 박량유를 보냈으나, 소항덕은 서경 이북의 땅을 에 넘기고 황주에서 자비령을 국경으로 할 것을 요구했다. 보고를 들은 고려 조정에서는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했으나,[46] 결국 성종은 중군사 서희를 파견하여 화의를 청했다.[39]

서희와의 협상을 통해 고려가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에 조공을 바치며, 의 역법을 채택하기로 합의했다.[18][19][20] 또한, 서희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협상 이후, 고려는 와 고려의 국경 사이, 당시 여진족 부족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압록강까지 포함하여 공식적으로 편입했다. 고려는 과거 그 땅이 고구려에 속해 있었다는 이유를 들었다.[21][22][23] 이 합의로 군대는 철수했다.

성종은 직접 예성강까지 서희를 맞이하여 노고를 위로했다.[46] 이듬해 994년, 서희가 이끄는 고려군은 여진족을 평정했다.[46] 고려는 강동 6주에 성채를 쌓고, 국경선을 압록강까지 확장했다.[51]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송나라와 계속해서 교류했으며,[24] 새로 얻은 북쪽 영토에 요새를 건설하여 방어를 강화했다.[25]

4. 2. 제2차 침입 (1010년-1011년)

1009년, 고려의 장군 강조가 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26] 요나라(거란)1010년, 살해당한 목종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다.[27][28]

강조는 요나라의 첫 번째 공격을 막았으나, 두 번째 공격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8][29] 고려 현종은 수도가 요나라에 의해 함락되고 불타자[28][30][31] 잠시 나주로 피신해야 했다.[8] 요나라는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재편된 고려군의 반격을 우려하여 철군하였다.[32]

1010년 11월, 요 성종이 이끄는 40만 요군이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했다.[39][43] 고려 조정은 강조를 행영도통사(총지휘관), 양규를 전선 지휘관, 최사위를 통군사로 각각 임명하고,[48] 30만 군세로 1차 충돌 이후 새롭게 확보한 지역인 강동 6주통주(평안북도 선천군)에 방어선을 구축했다.[39]

양규가 이끄는 흥화진 수비대는 요군의 맹공을 견뎌냈고, 요 성종은 20만 군세로 흥화진을 포위한 채 나머지 20만으로 남진했다.[48] 강조는 통주성에서 여러 차례 요군을 격파했으나, 결국 요군에게 대패하여 3만 명이 넘는 고려군이 사상하고 많은 병사가 포로가 되었으며, 강조 또한 살해되었다.[48]

동주, 곽주, 귀주, 영주의 함락과 강조의 패배 소식을 접한 고려 조정에서는 강화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나왔으나, 강감찬이 왕과 중앙 정부를 일시적으로 남쪽으로 피신시키고 군대를 재정비하여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종과 대신들은 강감찬의 의견에 동의했다.[48] 1011년 12월 28일, 고려 수뇌부는 남쪽 해안의 나주로 피신했고, 요군은 주요 도시인 서경(평양)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1011년 1월 1일에는 개경을 점령했다.[48]

그러나 강동 6주의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내륙으로 무리하게 진군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패잔병을 수습한 양규가 지속적인 후방 공격을 가하여 요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이 과정에서 이전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던 많은 포로들이 고려군에 합류했다. 양규는 7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통주로 이동하여 1000명이 넘는 병사를 모집하여 밤늦게 곽주에 잠입하여 곽주성 내의 요군 6000명을 전원 살해한 후, 성 내의 남녀 7000명 이상을 통주로 이동시켰다.[54]

양규김숙흥이 이끄는 고려군은 요군에게 귀주(구주)에서 매복 공격을 가하여 1만 명 이상을 죽였고, 양규가 이끄는 군세는 수일에 걸쳐 추격전을 벌여 7000명 이상을 죽이고 포로 5000명을 되찾았다. 패배에 격분한 요 성종은 대군을 이끌고 구주를 침공했다. 10일간의 격전 끝에 양규와 김숙흥은 전사했으나, 고려군은 요군을 크게 격파하고 포로 3만 명을 되찾았다. 패퇴한 요군은 압록강으로 후퇴했으나, 여기서 흥화진을 지키던 정성이 이끄는 고려군의 맹공을 받아 요군의 대부분이 익사했다. 개경 점령 10일 후인 1011년 1월 11일에 현종이 신하를 자처하며 화의를 청했기 때문에, 요군은 1차 침공 후에 정해진 조항에 더하여 매년 조공과 현종의 입조, 그리고 6주의 반환을 요구하고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개경은 요군에 의해 불타 버렸다.[49] 이후 고려군은 철수하는 요군을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철수하는 요군은 계속되는 폭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북부 여러 주의 성들도 요군이 돌아가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52]

4. 3. 제3차 침입 (1018년-1019년)

1018년, 거란은 소배압에게 고려를 침공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명의 병력으로 방어에 나섰다.[39] 강감찬은 흥화진 동쪽의 삼교천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고, 1만 2천 명의 정예병을 매복시켰다. 거란군이 삼교천에 이르자 둑을 터뜨려 급류를 흘려보내고 매복 공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39]

강민첨은 자주(慈州)에서 거란군을 공격했고,[39] 대동강 도하 지점에서는 조원이 이끄는 군대가 1만 명 이상의 거란군을 죽였다.[48] 김종현은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개경 방어에 합류했다.[48] 강감찬은 개경 주변을 초토화하여 거란군이 양식을 얻지 못하게 했다.[48] 거란군은 양식 부족과 고려군의 계속된 기습으로 전의를 상실했다.[48]

소배압이 후퇴를 시작하자, 강감찬은 추격을 명령했다. 1019년 2월 1일, 구주(龜州)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 주력 부대가 거란군의 퇴로를 끊었다.[48] 김종현이 이끄는 개경 수비군도 합류하여 고려군은 포위 공격을 펼쳤고, 거란군은 대부분 전멸했다.[39] (貴州大捷|귀주대첩중국어)

현종은 개선하는 강감찬을 영파역까지 나가 맞이하고, 직접 금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꽂아주며 축하했다.[39] 거란 성종은 대패에 분노하여 소배압을 면직시켰다.[55]

1020년, 고려가 다시 신하의 맹세와 조공을 약속하자 거란은 화의를 맺고 양국 간 평화가 회복되었다.[39][51]

5. 전쟁의 결과

1019년 전쟁이 끝난 후, 고려와 요는 사신을 주고받으며 외교 관계를 회복했다. 고려는 요의 제안을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 사용을 중단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가 요구했던 국왕의 친조(親朝)와 강동 6주 반환은 하지 않았다.[1]

요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면서 요동 지역 지배력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존재하는 한 송나라를 공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송-요 3국 간에는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 한편, 고려 역시 서북 지역에 큰 피해를 입어 북진 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어려워졌다.

민간에서는 요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간에 사행 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거란의 대장경이 고려로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었고,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1]

1020년 고려 현종은 다시 조공을 보내기 시작했고, 1022년 거란은 공식적으로 현종의 왕위를 인정했다. 이후 고려는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35][36][37][38]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거란은 압록강 주변 영토를 고려에 양보했다.

5. 1. 고려의 영토 확장과 국력 강화

1019년 전쟁이 끝난 후, 고려와 요는 사신을 주고받으며 외교 관계를 회복했다. 고려는 요의 제안을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 사용을 중단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가 요구했던 국왕의 직접 방문(친조)과 강동 6주 반환은 하지 않았다.[1]

요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면서 요동 지역 지배력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존재하는 한 송을 공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송-요 3국 간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한편, 고려 역시 서북 지역에 큰 피해를 입어 북진 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고려는 요와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흥화진 북쪽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고, 개경 수비를 위해 나성을 축조했다.[1]

민간에서는 요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간에 사신을 통한 무역(사행무역)이나 밀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거란대장경이 고려로 들어와 의천속장경 간행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원효의 《기신론소》가 거란에 전해져 널리 퍼지기도 했다.[1]

5. 2. 동아시아 세력 균형 형성

1019년 전쟁이 끝난 후, 고려와 요는 사신을 교환하며 외교 관계를 회복했다. 고려는 요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송의 연호 사용을 중단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요가 요구했던 국왕의 직접 방문(친조)과 강동 6주 반환은 이행하지 않았다.[35][36][37][38]

요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면서 요동 지역 지배력이 약화되었고, 고려가 존재하는 한 송을 공격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 송, 요 세 나라 사이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한편, 고려 역시 서북 지역에 큰 피해를 입어 북진 정책 추진이 어려워졌다. 이에 고려는 요와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흥화진 북쪽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고, 개경 방어를 위해 나성을 축조했다.

민간에서는 1125년 요가 멸망할 때까지 양국 간의 사행 무역(공식 무역)이나 밀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거란의 대장경이 고려에 전해져 의천속장경 간행에 영향을 주었고, 원효의 《기신론소》가 거란에 전해져 널리 퍼지기도 했다.

1020년 고려 현종은 다시 조공을 보내기 시작했고, 1022년 거란은 공식적으로 현종의 왕위를 인정했다. 이후 고려는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35][36][37][38]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거란은 압록강 주변 영토를 고려에 양보했다.

5. 3. 문화 교류

1019년 전쟁이 끝난 후, 고려와 거란(요나라)은 사신 왕래를 통해 국교를 회복했다. 민간에서는 1125년 요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양국 간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거란의 대장경은 고려에 들어와 의천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었고,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는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53]

994년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지배에 복종할 것을 알렸다. 이후 1010년 현종 원년까지 고려는 거란에 공물을 바치고, 거란어를 배우며, 결혼을 청하고, 화폐를 바치고, 책봉을 청하고, 생일을 축하하는 등 친선 관계를 맺었다.[53] 이 시기 『고려사』의 역사 기록에는 거란 황제를 “거란주”라고 기록하고 있다.[53]

6. 주요 인물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이후,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고 칙명을 받드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53] 1010년까지 고려는 거란에 공물을 바치고, 거란어를 배우며, 결혼을 청하는 등 친선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53] 그러나 현종은 거란의 요구를 거절하고 송나라와 국교를 회복하며 거란과 단교하였다.[43]

고려-거란 전쟁에서 활약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서희''': 1차 침입 당시 외교 협상을 통해 고려가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 '''강조''': 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거란이 침입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 '''양규''': 흥화진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거란군에 맞서 싸웠다.
  • '''강감찬''':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쳐 고려를 지켜냈다.
  • '''기타 인물''': 김숙흥, 정성 등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53] [43]

6. 1. 서희

993년, 요나라(거란)는 고려의 북서쪽 국경을 침략했다. 요나라 사령관은 군대 규모가 80만 명이었다고 주장했다.[8][9] 군사적 교착 상태가 이어진 후,[17] 양국 간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고려 외교관 서희는 협상을 주도하여, 고려가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요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요나라의 역법을 채택하는 조건으로, 압록강까지의 영토를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명분으로 공식 편입하는 데 합의했다.[18][19][20][21][22][23] 이 합의로 요나라 군대는 철수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후에도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며,[24] 새로 얻은 북쪽 영토에 요새를 건설하여 방어를 강화했다.[25]

6. 2. 강조

강조는 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인물로, 이 정변은 요나라(거란)가 고려를 침공하는 구실이 되었다.[26][27][28] 고려사에는 강조의 정변과 그 이후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강조는 요나라의 침입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처형되었다.[8][29][48]

강조의 정변은 고려 내정에 혼란을 야기했고, 요나라의 침입을 초래하여 국가적 위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다.

6. 3. 양규

1009년, 강조가 고려 목종을 시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수립하자,[26] 1010년, 살해당한 목종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다.[27][28]

요나라의 침입에 맞서 흥화진 전투 등에서 활약한 고려의 장군으로, 그의 용맹함과 헌신은 고려-거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 4. 강감찬

1018년, 거란이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을 때, 강감찬 장군은 고려군의 상원수(총사령관)를 맡았다. 그는 흥화진 동쪽 개울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었다가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둑을 터뜨려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1만 2천 명의 기병으로 기습 공격을 가해 거란군의 후퇴로를 차단했다.[39]

거란군은 수도 개경을 향해 계속 진격했지만,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과 끊임없는 공격에 부딪혀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강감찬은 각 요충지에 매복을 설치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고,[48] 후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 전투가 바로 귀주대첩이다.[35]

귀주대첩에서 살아남은 거란군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35] 고려에서는 강감찬이 개선하자 현종이 직접 나가 맞이하고 금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꽂아주며 축하했다.[39]

6. 5. 기타 인물

김숙흥, 정성 등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53] [43]

7. 역사적 평가와 의의

고려-거란 전쟁은 긍정적, 부정적, 현대적 시각에서 다양하게 평가된다. 긍정적으로는 고려가 거란에 맞서 외교와 군사적 노력을 통해 국가 자주성을 지키려 노력한 점을 들 수 있다. 반면,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피하고자 994년에 사신을 보내 복종 의사를 밝힌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자주 국방의 중요성과 외교적 노력의 필요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53]

7. 1. 긍정적 평가

고려는 거란의 침략에 맞서 외교와 군사적 노력을 통해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이후,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칙명을 받들겠다고 알리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53] 현종 원년(1010년)까지 고려는 거란에 공물을 바치고, 거란어를 배우며, 결혼을 청하고, 화폐를 바치고, 책봉을 청하고, 생일을 축하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친선을 유지했다.[53] 이러한 노력은 거란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실리적인 외교 관계를 통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고려사』는 이 시대의 역사 기록에서 거란 황제를 “거란주”라고 기록하고 있다.[53]

7. 2. 부정적 평가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994년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지배에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후 현종 원년(1010년)까지 거란에 공물을 바치고 거란어를 배우는 등 친선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53] 이 시기 『고려사』에는 거란 황제를 "거란주"로 기록하고 있다.[53]

7. 3. 현대적 의의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가 거란의 침입에 맞서 싸우면서 자주 국방의 중요성과 외교적 노력의 필요성을 보여준 사건이다.[53] 993년 거란은 압록강 이남고구려 옛 땅을 차지하기 위해 고려를 처음 공격하였다.[53] 994년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지배에 복종할 것을 알렸다.[53] 현종 원년까지 고려는 거란에 공물을 바치고, 거란어를 배우고, 결혼을 청하고, 화폐를 바치고, 책봉을 청하고, 생일을 축하하는 등 친선을 베풀었다.[53]고려사』는 이 시대의 역사 기록에서 거란 황제를 “거란주”라고 기록하고 있다.[53]

8. 대중문화 속 고려-거란 전쟁

고려-거란 전쟁은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 다뤄졌다.


  •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 서희의 외교 담판을 일부 다루고 있다.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는 천추태후를 중심으로 고려-거란 전쟁 시기를 다루고 있다.
  • 2023년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고려-거란 전쟁 시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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